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전쟁 범죄와 나치 논란 === 구데리안이 히틀러와 각별한 관계였음은 분명하지만 그가 열렬한 나치의 추종자였는지, 혹은 그저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순수한 군인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현재까지도 분분하다. 그는 전쟁에 필요하다면 [[괴벨스]], [[힘러]],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리벤트로프]]와 같은 고위 나치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개인적으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SS 장교들을 사상 덕분에 한자리나 차지해서 전쟁 진행을 방해하는 아마추어 취급하며 힘러를 무시했으며 공공연하게 자우허와 보어만을 혐오했다. 구데리안이 개인적 친분을 유지한 것은 전범행위에 비교적 덜 적극적이었던 슈페어와 디트리히 정도였다. 또한 야전사령관 시절 그의 휘하에 있던 군인들은 그가 현장에서 정치적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전쟁범죄 실행 명령을 실제로 내리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뉘른베르크 군사재판 당시 취조 및 진술 기록과 자서전에서 전쟁범죄 명령은 윗선이나 자신의 선에서 반려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명료한 반박 증언이나 증거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전범재판에서 인종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결 난 룬트슈테트의 경우 이후 학자들의 연구에서 인종학살에 책임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구데리안에게 전쟁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최전선 부대의 전쟁범죄는 그가 후방에서 근무했던 1943년부터 본격화되었고 구데리안이 마지막으로 야전에서 활동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하달된 전쟁범죄 명령들은 그가 속했던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보크]]가 자신의 직권으로 묵살해버렸다. 따라서 애초에 전쟁범죄에 엮여들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 동기이자 비슷한 군사 커리어를 밟아온 동료 만슈타인이 학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로 18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협조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포로 석방 이후 독일 남부에 거주할 때도 뮌헨 시에서 그를 전범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증거가 부족한 데다 전쟁 동안 구데리안 밑에서 일했던 군인들 수십 명이 그가 무고함을 두둔하는 진술서를 보냈던 탓에 결국 재판은 무산되었다.[* 장군부터 사병까지 계급을 막론한 기갑군인들이 옛 상관이 재판정에 설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진술서를 보내댔다. 그 중에는 구데리안의 첫 근무지 동료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부관도 있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재판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무고하게 엮여들어간 동료들과 부하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가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때 동료였던 군인들을 잡아넣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그보다는 구데리안이 수용소에 끌려갈 뻔한 지인들을 변호하고 보증했다는 증언이 더 많다. 가령, 계획에 참여했다 처형당한 [[에리히 펠기벨]] 육군 통신대장의 가족이 연좌제로 수용소에 끌려가자 그들을 구해냈다. 당시 동부전선 정보국장이자 훗날 CIA의 승인 하에서 정보조직 '겔렌 조직'을 만든 것으로 유명해진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평소 나치에 그다지 충성스럽게 굴지 않았으며 암살계획에 관여한 지인이 많았던 데다, 정보 조직을 전부 독점하려는 SS의 계획에 따라 체포당할 뻔했으나 구데리안 덕분에 직책과 목숨을 모두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주요 포섭 대상에 구데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서 암살 계획의 주모자들이 그를 히틀러에 충성하는 나치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구데리안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와 싸워댔던 [[발터 모델]]에게는 전혀 포섭 제의가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사상에도, 전범 행위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후에 나치즘의 기본 이념에는 문제가 없다고 발언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나누던 대화가 도청당하는 줄 몰랐다.] 육군 참모총장 취임 이후인 1944년 8월 25일에 참모장교들에게 내린 명령서에는 '''"귀관들보다 더 열광적으로 승리를 믿고 믿음을 발산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중략) 나치즘 없이 제국의 미래는 없다. 그러니 국가사회주의의 제국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 “Niemand darf fanatischer an den Sieg glauben und mehr Glauben ausstrahlen als Du. … Es gibt keine Zukunft des Reiches ohne den Nationalsozialismus. Deshalb stelle Dich bedingungslos vor das nationalsozialistische Reich.”]라고 적혀 있었다. 영국 정보부에 따르면 전쟁 이후 1950년에 나치 추종자들의 후조직이었던 브루더샤프트(Bruderschaft)라는 단체에 속했다.[* 이 조직의 수장은 나치당 지구장이었던 카를 카우프만(Karl Kaufmann)이었다. 카우프만은 전후 베르너 나우만을 중심으로 한 나치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원들과 FDP 등의 여러 정당 내로 정치적 잠입 및 전복을 시도하다가 영국 정보부에 걸려 2개월간 수감된 전적이 있다.] 전쟁범죄에 대해 재판받지 않았다는 사실도 마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전후 폴란드에서 [[바르샤바 봉기]] 무력진압과 관련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그를 재판정에 세우려고 했지만 미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폴란드 측에서 구데리안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염려한 미군은 그를 전사과로 보낸 뒤 그를 쓸 일이 있으니 소환 요구는 나중에 다시 하라고 폴란드에 통보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열렬한 국수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구데리안은 1919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 여러 장에서 볼셰비키들을 연쇄 살인마로, 슬라브인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1919년 5월 24일자 편지에서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들을 가난하고 더럽고 무능하고 멍청하고 사악하고 퇴폐적이고 교활한 미개 종자로 칭한다.] 또한 그는 히틀러가 갓 집권했을 무렵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어줄 인물이 나타났다고 즐거워했으며 전쟁 기간에는 나치 당원이었던 아내의 정치적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사실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나치즘에 당대 독일인의 평균 수준으로 동의하고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줄 히틀러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부차적 피해, 특히 '하등한 인종'에 대한 노역 동원과 대량 학살에는 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말이다. 후방 보직임에도 끊임없이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전선을 시찰하던 기갑총감 시절이나 육군 참모총장의 지위에서 전선에서 들어온 대부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던 시절에 전쟁범죄의 발생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은 적다. 서류로 올라오는 정보 외에도 아들 하인츠 귄터가 직접 목격한 전쟁범죄 사건들을 전달했기에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무력진압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민간인에 대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방군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몰랐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자서전이나 전후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전쟁범죄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순수한 군인으로서 전쟁에 임했다고 한들, 구데리안을 나치즘의 인종주의 이념을 토대로 한 인종범죄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깨끗한 군인으로 보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